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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 이기주의 새끼들 자영업 11년차가 느끼는 공무원의 무사안일편의주의, 극한이기주의의 대기업 아파트는 진짜 이기주의 끝판왕.
    카테고리 없음 2019. 12. 21. 16:26

    깍으며 7만원 범 나 13살 어린나이에 2교대 했음 나이 어려서 취업 안된다는거 사촌언니 이름으로 취업시킴 그 어린게 벌은돈 지 큰아들 대단한 지잡대 다니는 늠 생활비로 내 한달 월급 갖다바침 큰오빠ㅡ내 월급날이면 전화옴 돈부쳐라... 작은오빠ㅡ 엄마 중학교는 보내야한다.. 내가 벌어서 공부시킬게 제발.. 이라고 함 공장 2교대 넘 힘들어서 2년 다니다가 내나이





    도덕성이 어쩌고 어떻다는 둥… 입진보 들이 모든 것을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 만큼은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그냥 아무리 봐도 기분 나쁘다 정도 이상의 것은 보이질 않습니다. 당시의 제도가 그러해서 그런 제도를 이용해서 진학하는게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건가요? 그 제도를



    저는 어느 특정 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옳거나 그릇된 것에 대한 사리분별은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떠나 도덕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요즘에 어느 정부 기관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정말 문제가 많다고



    놓였다. 좋든 싫든 1970~80년대만 해도 군부·재벌·관료 주도의 사회 질서가 당시로서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지금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지만, 효과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관료·재벌·언론·국회·법조 등 사회 주체가 이기주의, 직무유기에 빠져 있어 유기적 협업이 되고 따로 논다. 어느 한 곳에서 직무를 유기해버리면 대한민국 미래는 마이너스가 되는 형국이다.” Q : ‘데이터 3법’도





    핵능력만 강화시키고 우리 군사력을 약화시켰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 주장이라고 했으며, 우리 군은 9.19군사합의 이전과 이후 시기에 관계없이 계획된 전력을 지속적으로 보강하고 있으며, 한미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한 가운데 상시 완벽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 특히 향군은 9.19 군사합의의 핵심내용인 “남북 쌍방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상대방의



    할 때 받았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김일성은 근면하고 지혜롭고 위신 있게 행동하였다. 매주 한번씩 거진 빠짐없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무실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는데 우리 서기들은 꼭 참가시켰다. 김일성은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설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말하였다. 그의 특징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도록 쉬운 말로 철저히 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한 다음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 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마음을, 이자스민 건으로 뿌리채 흔들리게 만드네요. 정의당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과 권리'에 방점이 찍힌 정당입니다. 물론 정의당의 '정의'라는게, 소수약자의 인권도 존중하라고 하는, 정의라고하는 단어의 그 축약된 함의이기는 하죠. 그러니 성소수자나 이민귀화자 등과 여성 및 노동자와 소외층 등의 사회적인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그 정체성이 규정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오직 그 분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서, 아직 미완의 국민주권이나 검찰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기회들이 희생된다면, 그건 한국당과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 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굳이 부정적인 면을 찾는다면.. 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 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있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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